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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에서 찾은 미놀타 X-300을 다시 쓰기까지

우연히 이 글을 펼친 당신에게애장품

이삿짐에서 찾은 미놀타 X-300을 다시 쓰기까지

이사를 앞두고 짐을 정리하다가 가죽 케이스에 든 오래된 필름 카메라 한 대를 찾았다. 케이스에는 三星 MINOLTA라는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내 어린 시절을 담으려고 사셨던 카메라라고 한다. 그 시절 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지금도 앨범에 남아 있다.

삼성과 미놀타라니, 낯선 조합이었다. 찾아보니 1980년대에 삼성이 미놀타와 손잡고 내놓은 카메라로, 그 시절 아버지들의 카메라였다고 한다. 미놀타에는 상급자용 X-700이 있었고, X-300은 누구나 편하게 찍을 수 있도록 그 X-700을 덜어 낸 보급형이었다.

필름 카메라는 처음이었다. 제대로 되는 건지 알 수 없어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 보고 필름 감기 레버도 돌려 보았다. 유튜브 영상 몇 편을 보고서야 LR44 배터리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고, 다이소에서 배터리를 사다 넣으니 전원이 들어왔다. 레버가 더 돌아가지 않던 것도 셔터가 이미 장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셔터를 누르자 찰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것이 필름 카메라의 소리구나 싶었다.

눈으로 살펴보니 렌즈 안에 곰팡이가 핀 것 말고는 겉은 아주 깨끗했다. 가죽 케이스 안에서 고이 지낸 덕분인 듯하다. 수리할 곳을 찾아보니 X-300은 당시 국민 카메라여서 어디서든 고칠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이름난 곳에 맡기고 싶었고, 자주 언급되는 몇 곳 가운데 세계카메라수리센터로 정했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찾아 읽은 블로그 글 가운데 그곳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후기 하나, 소개 글 하나가 이렇게 사람의 발길을 정한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 왜 중요한지 새삼 느꼈다.

2호선 을지로4가역에서 내려 한 블록쯤 걸으면 세운스퀘어가 나온다. 세운스퀘어는 귀금속관과 테크노관, 두 건물로 나뉘어 있다. 처음에는 둘이 이어져 있는 줄 알고 귀금속관으로 들어갔다가, 지도 앱을 다시 켜고서야 테크노관이 귀금속관을 지나 따로 서 있는 건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헤매다 겨우 찾아 들어간 테크노관 1층은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곳 같았다. 처음 와 본 곳인데도 낯설지 않았던 건, 예전에 들렀던 용산 전자상가를 닮아서였을 것이다.

복도에는 작은 카메라 가게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었다. 세기사 카메라도, 제일카메라수리도 수리점을 찾아보며 검색 결과에서 여러 번 본 이름이었다. 글로만 알던 가게들이 간판을 달고 눈앞에 나타나니 어쩐지 반가웠다. 세계카메라수리센터는 그 복도 안쪽에 있었다.

작업 중이던 사장님은 내가 몇 마디 채 꺼내기도 전에 다 알겠다는 듯 카메라를 받아 드셨다. 다이얼을 돌리고, 레버를 감고, 버튼을 하나씩 눌러 보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 작업대 위로 이런 카메라가 얼마나 많이 지나갔을까. 상태가 크게 나쁘지 않아 렌즈 청소와 부품 몇 개만 바꾸면 되겠다고 하셨고, 수리비는 7만 원쯤, 기간은 한 주쯤 걸린다고 하셨다. 접수증을 쓰고,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남기고 나왔다.

한 주 뒤 수리가 끝났다는 문자를 받고 오후 일정을 비운 채 다시 세운스퀘어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사진관에 들러 코닥 골드 200 한 롤을 샀다. 카메라가 제대로 살아났는지 알려면 결국 찍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은 무엇을 고쳤는지 하나하나 알려 주셨다. 필름은 처음이라 혹시 넣어 주실 수 있을지 여쭈었더니, 흔쾌히 넣어 주시며 요령까지 일러 주셨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그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다. 지금도 필름을 넣을 때면 그 영상을 꺼내 본다. 언젠가는 나도 사장님처럼 아무렇지 않게 필름을 넣게 되겠지. 간단한 조작법까지 배운 덕분에 그 자리에서 바로 찍기 시작할 수 있었다.

그날 세운스퀘어를 나와 청계천과 경복궁을 지나 시청까지 걸으며 한 롤을 거의 채웠고, 아껴 둔 마지막 몇 장은 몽이에게 썼다. 다음 날 고래사진관에 현상을 맡겼다. 스캐너 앞에서 내내 조마조마하다가, 몽이가 또렷하게 찍힌 한 장을 보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이 카메라는 여전히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운상가에서 수리한 미놀타 X-300과 코닥 골드 200의 첫 롤미놀타 X-300, 코닥 골드 200

처음 찾았을 때는 작동하는지조차 몰라 대충 훑어보고 말았다. 카메라가 다시 빛을 담는다는 걸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니, 그제야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렌즈 캡 대신 UV 필터 하나가 렌즈를 지켜 왔고, 그래서인지 필터에는 흠집이 많았다. 앞으로 외출할 때마다 함께할 카메라라면 제 짝을 찾아 주고 싶었다. 다행히 미놀타 로고가 새겨진 렌즈 캡이 아직 나와 있어서 바로 주문했다.

렌즈를 오래 지키려고 필터도 B+W 클리어 필터로 새로 바꿨다. 중고 렌즈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겠지만, 내 어린 시절을 담아 온 렌즈를 대신할 수는 없다.

스트랩 고리에 슨 녹은 오래된 스트랩에까지 배어 있었다. 마침 소니 카메라에 쓰던 픽디자인 앵커가 남아 있어 X-300에도 달았다. 이제 스트랩 하나로 두 카메라를 번갈아 쓸 수 있다.

필터를 새로 끼우고, 렌즈 캡을 씌우고, 스트랩을 걸었다. 틈새에 내려앉은 먼지까지 면봉으로 조심스레 걷어 내고 나니, 1980년대에 태어난 카메라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끔한 얼굴이 되었다.

처음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어 보니, 디지털카메라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씩 다가왔다. 레버를 감아야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손의 수고, 셔터가 떨어지는 찰칵 소리, 한 롤에 서른여섯 장뿐인 유한함. 무엇보다 필름 위의 한 컷은 그날의 빛이 직접 닿아 남긴 자국이다. 지우고 다시 찍을 수 없으니, 한 장 한 장이 세상에 하나뿐이다.

한때 렌즈 앞에 선 아이를 담던 이 카메라는, 이제 렌즈 뒤에 선 내 시선을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