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놀타 X-300·코닥 골드 200·
세운상가에서 수리한 미놀타 X-300과 코닥 골드 200의 첫 롤
어린 시절의 나를 담아 주던 카메라로 처음 담아 본 나의 시선
멈춰 있던 필름 카메라가 다시 살아났다. 청계천에서 경복궁을 지나 광화문까지 한 장씩 시험하고, 아껴 둔 마지막 몇 장으로 몽이를 담았다.
- 필름
- Kodak Gold 200
- 카메라
- Minolta X-300
- 종류
- C-41 컬러 네거티브
- 포맷
- 135-36
- 촬영 기간
- 2026년 9월 14일 ~ 2026년 9월 15일
- 현상
- 고래사진관
- 스캔
- Noritsu
- 프레임
- 14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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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14
수리가 끝났다는 메시지를 받고 오후 일정을 비웠다. 어린 시절의 나를 찍어 주던 미놀타 X-300을 찾으러 을지로 세운상가로 서둘러 갔다. 멈춰 있던 카메라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사장님께 고마운 마음을 담아, 첫 셔터는 가게 안에서 눌렀다.
02/ 14
필름 카메라가 제대로 살아났는지 알려면 찍고 현상해 보는 수밖에 없다. 세운상가를 나와 청계천 물길을 따라 걸으며 셔터를 눌렀다.
03/ 14
노출계와 조리개 우선 모드가 있으니 나는 초점만 맞추면 됐다. 걷다가 마주친 평화로운 오후 앞에서 천천히 초점링을 돌렸다. 노출은 맞았을까, 초점은 맞았을까. 셔터를 누를 때마다 의심이 따라붙었지만 그 불안이 싫지 않았다. 다행히 물가에서 쉬어 가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04/ 14
계단에 앉아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앞에서 레버를 감아 그 모습을 담았다. 소니의 빠른 자동 초점에 길든 손은 자꾸 머뭇거렸다. 그 머뭇거림마저 이 롤의 분위기가 되었다.
05/ 14
평일 낮인데도 청계천은 붐볐다. 연인과 관광객, 근처 회사원들이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고 있었다.
06/ 14
돌 위에 백로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과 영상을 남기는 사이, 나는 필름을 감고 자리를 이리저리 옮기며 뷰파인더 속 초점을 맞췄다. 그동안 날아가 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07/ 14
다리 아래 그늘에서는 어두운 곳이 어떻게 찍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물소리 곁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한 한 사람을 담았다. 현상해 보니 역시 흔들렸다. 흔들렸으면 흔들린 대로, 그마저 이 한 장의 매력이다.
08/ 14
청계천을 벗어나서도 필름이 남아 발길이 자연스레 경복궁으로 향했다. 산을 등진 돌담을 따라 한복 차림의 두 사람이 걸어갔다. 이번 롤의 풍경 가운데서는 이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
09/ 14
디지털카메라였다면 가볍게 한 장 찍고 지나갔을 텐데, 초점을 맞추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누군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관광객들은 오히려 환하게 웃어 주었다. 여행 중이라 마음이 넉넉한 걸까.
10/ 14
돌담길을 따라 걷다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던 카페 앞에서 한 장을 더 담았다. 머지않아 은행나무가 물들면 이 길도 온통 노랗겠지. 그때 다시 필름을 들고 와야겠다.
11/ 14
시청역으로 가는 길, 볕이 쏟아지는 광화문광장을 담았다. 아무래도 노출이 넘친 것 같다. 조리개 우선 모드라도 셔터 속도가 1/1000초에서 멈추니 이 빛은 벅찼을지 모른다. 그래도 밝은 곳이 하얗게 날아가지 않고 결을 남겨 두었다. 필름은 넘치는 빛에 너그럽다.
12/ 14
우거진 숲 위로 시청광장의 플라자 호텔이 솟아 있었다. 파란 하늘과 붉은 벽, 짙은 초록이 필름에 어떻게 남을지 궁금해하며 오늘의 풍경은 여기서 접었다. 남은 몇 장은 일부러 아껴 두었다. 몽이 몫이다.
13/ 14
필름으로 꼭 담고 싶었던 건 역시 몽이였다. 창가 캣타워에서 졸린 눈을 배시시 뜬 몽이 앞에서, 종로 거리를 거닐며 익힌 초점 맞추기를 마음껏 써먹었다. 스캐너 앞에서 내내 조마조마했는데, 이 한 장을 보고서야 모든 걱정이 풀렸다. 이번 롤에서 첫손에 꼽는 사진이다.
14/ 14
초점도 노출도 구도도,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는 무엇 하나 알 수 없다. 그래서 몽이 곁을 맴돌며 아껴 둔 필름을 아낌없이 감았다. 몽이는 어지간히 귀찮은 눈치였다. 한창 낮잠 잘 시간이었으니. 끝내 몽이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